버마자료 & NEWS2005/11/12 20:52
〈유해정/인권운동 사랑방 상임활동가〉

“그립다”고 했다. 생이별이 가슴 아프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한참을 참새처럼 조잘거리다 ‘가족’이란 한마디에 금세 눈물이 고인 눈망울을 보자 괜한 얘기를 꺼냈다 싶었다. 하지만 더욱 가슴이 저밈은 랑의 이별에 기약이 없다는 것. 언제쯤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지, 무사히 가족들과 조우할 수 있을지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랑이 돌아가려고 해도 그의 조국은 그를 반기지 않는다. 해서 꿈속에서 나서는 귀향길조차 총을 든 군인이 따라와 어김없이 그의 길을 가로막는다.

“공부를 더하고 싶었어요.” 소수민족은 더럽고 게으르다는 선생들의 차별과 손가락질 속에서도 그만두고 싶지 않은 학교였다. 하지만 가난은 랑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고, 17살의 랑은 학비를 벌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국경 난민들을 통해 자신이 왜 차별받아야 했는지, 왜 소수민족들은 더 궁핍하게 살 수밖에 없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1962년 네윈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뒤 40년 넘게 계속된 군부의 철권통치는 미얀마 내의 인권과 민주를 앗아간 것은 물론 경제마저 피폐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미얀마족 중심의 민족주의 정책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소외, 무자비한 탄압을 낳았다. 민주화와 소수민족의 권리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 내몰렸고, 지금도 피 흘리고 있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버마 군부의 40년 철권통치-

그래서 시작했다. 돈을 버는 것 대신 민주화를 위해, 소수민족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힘을 보태기로. 4년 동안 4번이나 태국 경찰에 의해 불법체류자로 체포되고 그 과정에서 미얀마 군부로 넘겨져 본국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제복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가슴이 내려앉고, 매일 안전한 잠자리를 찾아 헤매야 하지만, 21살 랑은 사람이고 싶어 “멈추고 싶지 않다”고 했다. 랑의 동료들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앉아서 희망을 꿈꾸지만도 않는다. 10년 넘게 만나지 못한 자식과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사는 슈는 해방된 미얀마에서 모든 민족들이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민주적 헌법을 만들기 위해 밤잠을 설친다. 분쟁의 고아로 스무 해를 승려로 산 토마스는 군부독재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하거나 분쟁에서 터전을 잃은 난민의 현실을 알리는 사진전에 동분서주한다.

현재 미얀마 난민은 1백만명에 이른다. 만취한 낯선 사내가 새벽녘 집 앞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 경찰에 노출돼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한걸음에 달려 온 레오는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일한다. 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 90만명 중 60만명이 미얀마인들이다. 조국으로부터 박해받고 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그림자처럼 살아가야 하지만 이들 모두 미얀마에 대한 애정을, 사람을 향한 따스함을 안고 산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전할 수 있는 건 우울한 소식뿐이다. 개발이 진행되면 군부가 사람들을 땅에서 내몰고, 혹독한 강제노동을 부과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는 미얀마 군부와 공동으로 가스개발 사업에 착수했다. 한국 정부는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국내 미얀마인들의 난민신청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땅으로 강제출국 명령을 내렸다. 더딘 시간만큼이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미얀마는 희미해져가고, 그만큼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우리 사회의 동참의 손길도 줄어들고 있다.

-민주화 동참의 손길 아쉬워-

랑이 말한다. 고맙다고. 하지만 정작 고마운 건 나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방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기에. 때론 그것이 묵직한 짐으로 어깨를 짓누르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고 웃으며 살아가는 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음에 정작 고마운 건 나다. 전염이라도 되듯 나의 가슴 벅참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여유 없는 일상이지만 그들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자리 한쪽을 당신의 마음에 기쁘게 내어주기를.

(태국 치앙마이에서)
최종 편집: 2005년 11월 11일 17:54:36
Posted by 꼬 마웅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