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05 17:06

"아인슈타인도 한국에선 공장 일했을 것"

[충격 인터뷰] ‘난민에 수갑 채우는 한국’
                                                                    김진영 기자2007/02/05 [12:58]

우리나라에서 2001년 처음으로 난민이 인정된 후, 난민과 난민신청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난민 관리 제도는 아직도 출입국 관리의 차원이나 이주 노동자 문제의 한 부분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제도적 미비로 인해 난민과 난민 신청자들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침해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불법 체류와 난민을 동일시하는 출입국 관리소나 기본적 생계도 보장해 주지 않는 한국의 정부 태도에 이상적인 나라로 한국을 그려 왔던 난민들의 꿈은 깨지기 일쑤다.

미얀마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 1994년 한국으로 망명 온 마웅저의 증언을 통해 한국의 난민 관리 실태에 대해 알아보았다.

첫 사람 한시간, 마지막 사람 10분…하루에 21명 면담 끝내
이상적 나라로 ‘한국’ 꿈꿔온 난민들 열악한 현실에 절망 

올림픽으로 한반도 전체가 들떠 있던 1988년 9월, 미얀마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총에 맞거나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흔적도 없이 실종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당시 학생 신분으로 민주화 항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마웅저(33) 또한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처럼 자신을 키워 왔던 누나가 “운동을 포기하던지, 도망을 가던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감옥에 있던 동지들도 “이대로 너까지 잡혀 들어오면 희망이 없다”며, “다른 곳에서 민주화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고 했다.

한국 돈 3백 5십만 원. 당시 미얀마 시내에 빌라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 돈을 브로커에게 건네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민주주의를 간절히 염원하는 그들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과 김대중에 관한 기사는 한국을 ‘이상적’ 나라로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첫 느낌은 “한국에 잘못 들어왔다”였다. 당시 이주 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친구는 마웅저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 도망 왔다는 사실에 너무 겁을 냈다. 

그는 “대사관에 날 숨겨줬다는 사실이 알려지거나, 나의 친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도 감옥에 가게 될까 두려워했다. 한국에 살게 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친구는 시장 가기도 겁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난민’이라는 의미

아직도 한국에서 ‘난민’이라는 단어는 생소하다. ‘난민’을 이재민이나, 식량을 찾아 떠나 온 불쌍한(?) 사람들로만 생각하는 한국인도 많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로 인종적, 사상적 원인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에 의한 집단적 망명자를 난민이라 일컫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 협약과 난민 의정서에 가입했지만, 2000년까지 1백여 명이 난민 지위를 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난민도 인정하지 않다가, 2001년에 이르러서야 에티오피아 출신의 1명을 난민으로 인정한 바 있다.

인천 공항 출입국 관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3월을 기준으로 8백49명이 난민 신청을 하였는데, 난민 신청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1년에 최초의 난민이 인정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난민으로 인정받은 인원은 총 47명. 그러나 불허된 경우와 아직 대기 중인 경우가 절반이 넘는 6백여 명에 달한다.

마웅저는 “대부분 한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오는 사람들은 한국을 고국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민주화에 성공한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 한다”며, “그러나 한국은 약속의 땅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21명 한 자리에서 동시심사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한 친구가 1999년에 한국에서 체포되면서, 긴장감은 더해졌다.

마웅저는 “친구는 미얀마로 가는 도중 운 좋게도 태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만약 미얀마로 돌아가게 됐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고국에서 존경받는 민주화 운동가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불법체류자와 다름없었다.

그는 “체포당한다면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난민을 신청하는 방법을 찾게 됐다.”고 밝혔다.

난민 신청은 입국 후 6개월 이내에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난민 규정이 생긴 이후, 이미 들어와 있던 난민들의 체류 기간은 6개월을 훨씬 넘어 있었다.

계속해서 거절당하던 난민 신청은 2002년 5월, 21명의 미얀마 민주 운동가들이 한 인권 변호사를 만나면서 현실로 이루어졌다.

국적 취득 이주 노동자를 임시 통역관 고용, 실수 잦고
개별 면담, 비밀 보장 등 기본적 난민 협약도 안 지켜져

그러나 기대에 부푼 이들에게 당시 한국의 난민 심사 환경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정치 운동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 보장은커녕 인권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한국말이 서툰 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은 정식 전문 통역이 아니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주 노동자가 임시로 고용됐다.

그러나 “고국과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은 위험하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 대사관과 교류할 수도 있고,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정부와 소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해도, 통역관이 돼 주었다는 것을 알면 미얀마 정부에서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런 세심한 배려까지 한국 정부에 기대할 수는 없었다.

21명을 심사하기 위해 나온 출입국 관리소의 직원은 모두 세 명. 이전까지 이주 노동자나 불법 체류를 담당하던 직원들이었다.

한국 앰네스티의 한 관계자는 "면담은 안전한 곳에서 비공개로,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며, 한국의 열악한 현실에 대해 밝혔다.

“민주화 운동은 당신네 나라에서 해라”

난민을 대상으로 하는 출입국 관리소의 직원들이 ‘인권’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한 콩고 난민은 “불법 이주 노동자들만을 다루던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은 피부색이 다른 난민들은 무조건 죄인 취급 한다”고 말했다.

“민주화 운동은 당신네 나라에서나 하지, 왜 우리나라까지 와서 시끄럽게 하냐.”는 것이 그들의 기본 입장.

변호사는 절대 합석할 수 없다. 녹음은 절대 할 수 없고, 직원들이 직접 타이핑을 하거나 메모를 한다. 난민인정불허를 통보받은 후,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확인하는 것도 힘들다.

미얀마의 또 다른 난민은 “우리 심사에 대해 우리가 확인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공란(空欄)으로 비워져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얼마나 ‘대충’ 듣는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출입국 관리소의 직원들은 면담 내내 담배도 피고,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한참동안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도 한다. 그것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직원들의 조급함은 난민들의 눈에 확연히 띈다.

첫 사람의 면담에 1시간이 소요됐다면 두 번 째 사람부터 면담 시간은 조금씩 줄어든다. 마지막 즈음에는 10분도 안 되는 시간만 할애받기도 한다. 

질문은 똑같은 내용으로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왜 한국으로 들어왔는지, 왜 이곳까지 와서 민주화 운동을 하려고 하는지가 반복되는 내용.

5년 동안 세 번의 난민 심사를 받아본 마웅저는 “단 한번도 일대일로 면담을 받아본 적이 없고, 더 자세한 내용을 물어온 적도 없다. 질문 내용은 외울 정도”라고 전했다.

그는 “직원들은 우리의 출입국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 개별 사정에 대해서는 절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난민 신청에 대해 처음 접해 보는 것이다.”며, “우리 문제도 출입국 관리소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난민과 이주 노동자는 확실히 다른 문제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는 또, “난민들이 한국에서 가장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은 병원도, 경찰서도 아닌 출입국 관리소”라며, “어떤 때는 네 번만 심사를 받게 해 준 것이 정말 감사하기도 하다”고 전했다.

난민 인정이 불허된다 해도, 사유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작년 하반기부터 영문 통지서가 같이 나와서 어떤 내용으로 난민 인정이 불허됐는지 알 수 있게 됐지만, 그 전에는 한국어 사유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 난민 신청을 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왜 난민으로 인정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영문 통지서에 기재되는 이유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 미얀마의 소수 민족으로 인도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한 난민은 얼마 전, 불허 통지서에서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난민 운동가 최민호(가명)씨는 “협약에 따르면, 난민 신청자는 자신의 진술에 근거를 제시할 의무가 없다. 조사관이 직접 조사를 해야 할 의무”라며, “인권 단체에서 조금만 조사를 해도 나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조사를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또, 급하게 도망 나오는 난민들이 증거를 갖고 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 그는 “객관적 증거를 가져 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왜 먼 곳까지 망명을 오겠느냐”며 되묻기도 했다.

당장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별 문제없지 않느냐는 것이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의 한결같은 태도. 마웅저는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을 직접 확인해 본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고 전하기도 했다.

모호한 난민 인정 기준

난민 인정의 기준도 모호하다. 마웅저와 함께 난민 신청을 했던 21명 중, 인정을 받은 세 명은 한국에서 조직한 미얀마 민주화 운동 단체의 회장과 부회장, 총무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는 “우리는 다 같은 학생이었고, 동지였다. 편의상 직책을 나눴을 뿐이다.”며 한국 공무원들의 ‘방만한’ 일 처리에 문제를 제기했다.

다음 번 난민 인정 결과는 더 가관. 2005년에 있었던 난민 신청에서 인정을 받은 네 명은 함께 받은 신청자들 중 나이가 많은 순.

만약 마웅저씨가 단체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진작 인정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민 연대에서 인턴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 달에 4십 만원의 생계비를 지원받으며 살고 있다.

그에게 한국으로 오고 싶어 하는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되도록이면 나라 안에서 민주화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하고 싶다”고 전했다.

“고국에서 받는 어떤 박해도 외국에서 받는 설움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며 타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정치인의 살인 현장을 목격한 뒤, 한국으로 망명 왔던 방글라데시 난민은 통역관의 실수로 순식간에 살인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 기재된 ‘살인자’의 딱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시민 단체에서 보석금 아닌 보석금을 대신 내 주고 난 뒤에야 풀려 날 수 있었다.

난민 활동가 최민호씨는 “난민들을 다루는 공무원이라면, 일반 공무원과는 다른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정치적인 박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며, “그 나라의 관점으로 보려 하지 않고, 현재의 한국의 상황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난민을 인정받은 사람도, 한국에서의 처우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교수나 변호사라 해도, 일단 한국에 난민으로 들어오게 되면 공장 일부터 해야 되는 것이 한국의 현실.

한국 앰네스티의 한 관계자는 “아인슈타인도 난민이었다. 2000년대의 한국에 와서 아인슈타인이 난민을 신청한다 해도, 그는 공장에서 일했을 것이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한편, 법무부는 난민과 관련한 제개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2005년 9월에 개정안을 결정한 바 있으며, 2006년 2월에는 출입국 관리국의 자체적인 출입국 관리법 개정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여 법무부의 최종적 개정안으로 2006년 7월 12일 출입국 관리법 개정안을 발효한 바 있다.

이 개정안에서는 난민 신청기한 제한의 폐지, 이의 신청 기간의 확대, 난민에 대한 취업 자격 보장과 난민신청자에 대한 선별적인 취업자격 부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 현재까지 출입국 관리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난민 인정 절차는 법무부 인권국의 업무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난민담당 한 관계자는 “난민인정절차 과정에서 변호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비롯한 법률적 지원과 적절한 통역의 제공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한편, “신청인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 있도록 행정소송과 심사자료 열람권을 보장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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