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2/27 미얀마 유감(遺憾) (1)
  2. 2009/02/24 철창 너머 드러난 21세기 생지옥(시사저널)
  3. 2009/02/17 [여적]독재자 차베스
  4. 2009/02/02 전쟁의 눈물 쫓아 20년…그녀는 ‘다큐 독립군’
2009/02/27 16:45

미얀마 유감(遺憾)

신 윤 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지난 2월 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나라 미얀마(버마)를 여행했다. 12년 전 처음 여행한 이래 네 번째 방문이었는데, 전문가도 아닌 사람으로서 동남아에서 가장 폐쇄적인 이 나라를 각별히 자주 찾은 셈이다.  이번 여행은 누구누구라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곳에 거주하거나 체류하는 한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 특히 각별한 여행이었다.  이들로부터 들은 미얀마에 대한 평가와 판단도 그렇고 한국인들이 쓴 여행안내 책자와 인터넷 상에 떠다니는 젊은이의 여행기도 비슷한 미얀마관(觀)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 이에 대한 나의 소감과 유감을 전하려 한다.


미얀마는 명백한 군사독재국가이다.  미얀마의 군사독재는 현역 장성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군인이 직접 통치하는 독재’이다.  흔히들 독재라고 할 때 권위주의 체제를 지칭하지만, 미얀마 독재는 이보다 훨씬 통제와 억압의 정도가 강한 전체주의 체제에 가깝다.  국영밖에 없는 미얀마의 방송과 언론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짧은 방송 시간과 적은 신문 지면을 자랑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철저히 막고 있다.  외국이나 외국인과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들에 대한 접속을 차단하고 있으며 주요 관광지를 빼고는, 특히 소수민족 거주지역에 대해서는, 외국인의 여행을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있다.  대학은 외국인 입학은 고사하고 출입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1988년 민주화 시위 이후에는 몇 년씩 휴교와 개교를 반복하며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왔으며, 한때 동남아 최고의 명문대학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랑군(Rangoon) 대학은 양곤 대학으로 개칭된 뒤 학생운동의 메카로 변하자 1996년부터는 학부과정을 아예 없애 버렸다. 과거 한국 대학가의 프락치와 유사한 정보기관의 “스파이”들은 캠퍼스뿐만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하여 감시할 정도로 그 수가 많다.


미얀마 군사정권은 정통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1990년 버마 역사상 처음 실시된 다당제 민주선거에서 친군부 정당인 국민단합당은 득표율 21.2%로 국회 의석 총 485석 중 10석을 회득하는 데 그쳐,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전국민주연맹의 59.9%와 392석과 비교도 안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슬로옥)라는 당시 최고기관은 아무런 이유 없이 선거결과에 따른 정권이양을 거부하였다. 세계 선거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야당지도자 아웅산수찌는 1989년 이후 20년 중 14년을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고 그 와중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군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이 되는 2010년 다시 총선을 실시하겠다며 작년 말 새로운 헌법을 제정, 선포하였지만, 그 의도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이미 가장 큰 10개의 소수민족 중앙조직들이 헌법을 비난하고 내년 선거를 거부하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분리독립을 주장하던 소수민족 무장투쟁단체와 지도자 몇몇이 정부가 제공한 이권을 챙기고 무기를 놓았고 소수민족 지역에 평화가 왔다고 미얀마 군사정부는 주장하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소수민족들이 미얀마와 통합과 평화협정을 지지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지난 10여 년간 샨족, 몬족, 카렌족 등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에서 미얀마 군부가 자행한 강간, 고문, 살인 등 잔학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수없이 들어나 국제사회의 분노를 사고 있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소수민족 출신 난민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돌고 있고, 수십만 명은 국경을 넘어 태국의 난민촌에서 인간 이하를 생활을 하고 있다.


미얀마 군사독재의 압권은 최고지도자들의 만행에 가까운 기행들이다.  1962년부터 무려 30년 가까이 통치했던 네윈(New Win)의 몇 가지 ‘치적’은 역사 속에 기록될 것들이다.   네윈은 점쟁이 말을 듣고 우파들을 없애려 했는지, 꿈에 계시를 받아 그랬는지 모르지만, 1970년 어느 날 차선을 우측통행으로 변경한다고 선포하여 수십 년 된 일제 버스가 그대로 굴러다니는 양곤에서 승객들이 길 복판으로 내리는 위험과 불편을 지금까지 감수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어떤 때에는 예날 지폐를 환불해 주지 않아 휴지조각으로 변하였고, 1985년에는 20, 50, 100짯짜리를 대신하여 25짯, (보지도 듣지도 못한) 35짯, 75짯짜리를 만들더니, 1987년에는 이 단위를 다시 없애고 이번에는 45짯, 90짯짜리를 발행하는 횡포를 저질렀다. 이 모두 수비학(numerology)과 점성술(astrology)에 현혹된 군부지도자들의 소행이었다.


1992년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딴쉐(Than Shwe)도 횡포와 기행으로 점철된 군부통치의 전통을 유감없이 계승하였다.  2005년 11월 군사정부는 수도를 양곤에서 오지 삐마나(네삐도)로 이미 옮기기 시작하였다고 발표하여 세계뿐만 아니라 미얀마 국민들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공무원들에게는 불과 이틀 전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침공에 대비했다고도 하고 역시 점성술사의 조언이었다고 하지만, 21세기에 존재하는 국가의 정책을 결정한 요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2007년 9월에는 1988년 이후 최대의 민주화 시위 사태에 직면한 군사정권은 신성시되는 승려들까지 구타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만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작년 싸이클론 나르기스가 남부 미얀마를 휩쓸어 15만여 명의 목숨을 집어 삼킨 직후에는 외국인 원조단과 자원봉사단의 입국을 거부하여 백척간두에 놓인 국민들의 목숨보다 정권에 대한 조그만 위협이 더 걱정임을 여실이 드러냈다.


이렇듯 시대착오적이고 잔인무도한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논리와 심지어 찬양하는 입장들까지 버젓이 우리 한국 사람들 사이에 나도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가장 흔히 내세우는 입장은 박정희식의 개발독재의 논리에 입각한 것으로서, 미얀마 같은 후진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군부가 그것을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미얀마 군부는 무려 반세기를 통치하였지만, 비약적 성장은 고사하고 한때 동남아 부국의 하나였던 버마를 아시아 최빈국의 하나로 전락시켰다. “개발독재”가 아니라 “빈곤독재” 또는 “저개발독재”라 불러 마땅하다.  또 다른 주장은 군부만이 국민의 40%가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이 다민족사회를 하나의 국민 또는 새로운 민족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정치안정을 앞세우는 입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통합의 방식을 무시한 반민주적이고,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부인하는 반인권적인 논리에 입각한 것으로 미얀마 군부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를 앞세워 미얀마를 봉쇄한 미국과 유럽의 패권주의와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이에 저항하는 미얀마 군사정부의 민족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옹호론자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야당지도자 아웅산수찌는 외국에서 자라 외국인 남편을 두었으며 서구 강대국의 앞잡이로서 국내에는 아무런 인기가 없다고 주장한다.  과거 야당지도자들을 반민족적이라 몰던 유신독재나 전두환독재 시절과 너무나도 닮았는데, 국제사회로부터 정보가 차단된 미얀마 사람도 아니고 외국을 수시로 드나들고 민주화까지 일궈낸 한국인들이 군부독재자들의 선전과 세뇌공작에 넘어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류가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고 교민 수가 급증한 이즈음에, 우리도 미얀마의 진정한 발전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고 이 나라의 개방과 민주화에 힘과 행동을 보태는 일류국민의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Trackback 1 Comment 1
2009/02/24 11:27

철창 너머 드러난 21세기 생지옥(시사저널)

미얀마정치범지원협회, 정부가 수감한 정치범 참상 추적해 폭로…
“감옥에 세상의 빛을”

[1007호] 2009년 02월 04일 (수)             홍래 편집위원

 












▲ 전국미얀마연방협의회의 쿤 민트 툰 씨(맨 오른쪽)가 헌법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지라고 촉구하고 있다

미얀마의 감옥에서 7년째 복역 중인 반체제 인사 아웅은 폐결핵에 걸렸다. 하지만 이 사실을 교도관에게 말할 수 없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오랫동안 잠을 자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기침을 할 때 나오는 피를 컵에 가득 받아 교도관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나병 환자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폐병은 다소 회복되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영원히 잃었다.

아웅의 얘기는 최근 한 기자와 미얀마 접경의 태국 마을에 정착한 옛 미얀마 정치범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은 미얀마정치범지원협회 회원이다. 이들은 9년 전부터 미얀마 감옥에 투옥된 정치범 2천100여 명의 실태를 추적해 그 참상을 세상에 알리고 정치범과 그 가족들을 돕고 있다. 이 단체가 요즘 부쩍 바빠졌다.

미얀마 군사정부는 지난해 4백10명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수년에서 50년 혹은 그 이상의 형을 선고했다. 협회는 재판과 관련된 상세한 정보를 온라인 사이트에 올렸다. 사이트를 통해 미얀마 감옥의 참상은 상세하게 알려졌다. 외교관, 유엔 관리, 인권 단체들은 이 사이트를 통해 대책을 협의했다. 다른 6백명은 아직 재판도 받지 못하고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다.

온라인 사이트에 재판 관련 정보 상세히 올려

지난해에 기소된 사람 가운데는 80세의 여승이 한 명 있다. 이 여승은 2007년 9월 승려들의 반정부 시위에 가담한 협의로 4년간의 중노동형을 받았다. 군부는 노쇠한 여승이 중노동을 할 수 없자 불교를 모욕한 혐의로 죄명을 바꾸었다. 노령의 승려에게는 가장 모욕적인 처사이다.

미얀마에서 유명한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한 반체제 인사는 59년형을 받았다. 정부가 지난해 5월 미얀마를 강타한 사이클론 희생자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한 혐의이다. 당시 13만명이 죽었다. 정부가 국제 구호 기관들의 현장 접근을 봉쇄하는 바람에 사망자가 늘었다. 2007년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또 다른 승려는 68년형을 받았다.

인권 단체의 온라인 사이트에 소개된 정치범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농부, 블로거, 아이스크림 판매원, 버스 기사, 힙합 가수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 유엔 보고서와 외교관들의 설명에 따르면 미얀마 군부의 눈에 정치범들은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 이는 곧 미얀마 군부의 인권 유린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협회 멤버들은 가족애로 뭉쳐 있다. 이들은 의약품, 도서, 담요, 식품 등을 재소자들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물품들이 정치범들에게 쉽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교도관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 교도관들도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뇌물을 받지 않고는 생활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샤워를 하기 위해 물이 더 필요하면 뇌물을 바쳐야 한다. 일부 감옥은 너무 좁아 죄수들이 모로 누워 자야 한다. 그러나 VIP용 감방에서는 편히 누워 잘 수 있다. 단, 뇌물이 필요하다.

협회의 기금은 20만 달러 정도 된다. 미국 정부의 민주주의지원 기금과 네덜란드 정부 및 일부 민간 원조 기관이 지원한 돈이다. 기금은 투옥된 정치범들을 돕는 데 주로 사용되지만 체포될 위험이 있는 정치범을 탈출시키는 데도 쓰인다. 협회는 2년 전 14년째 투옥된 대학생을 탈출시키기 위해 100달러를 송금했다. 그는 현재 태국에서 살고 있다. 비록 궁핍하게 살지만 미얀마 감옥에 비하면 천국이다.

미얀마의 대표적 정치범은 아웅산 수치 여사이다. 그녀는 지금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노벨 평화상까지 탄 수치 여사는 그래도 관심을 받고 있으나 미얀마의 보통 정치범들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다. 미얀마의 정치범 생활은 암흑 그 자체이다. 많은 정치범들에게 하루 20분만 감방 밖으로 나오는 것이 허용된다. 정치범들은 또한, 일반 잡범들과 함께 수용된다. 툭하면 가족과 멀리 떨어진 시골 감방으로 옮겨 면회도 못하게 한다. 벽지 감방에는 의료시설도 의약품도 없다.

하루 20분만 감방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암흑 생활

인권협회 인사들이 원하는 것은 미얀마의 감옥에 세상의 빛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협회의 로고는 감방에 비치는 햇빛을 상징하고 있다. 모서리로 누워 잘 수밖에 없는 과밀 상태의 좁은 감방, 부족한 음식, 죄수들이 변기로 사용하는 냄새나는 깡통은 미얀마 교도소의 명물이다. 미얀마 정치범들의 고난은 가족에게로 확대된다. 군부는 정치범 가족들을 먼 곳으로 소개시키거나 갖은 방법으로 박해한다. 지난해 10월 어느 정치범의 아내는 돈이 떨어져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잘라 20 달러에 팔았다. 미얀마 여인들에게는 긴 머리가 미와 인격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이 소식을 접한 인권협회는 그 여인에게 소액을 보내 구멍가게를 열게 도와주었다. 긴 수감 끝에 석방된 한 정치범은 서툰 영어로 감방의 참상을 번역해 사이트에 올렸다.

협회 인사들은 뇌물을 받은 교도관, 전 정치범, 가족들로 구성된 이른바 동정세력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범 실태를 추적한다.

미얀마 군부의 비밀 장막 속에 침투하는 데 이들 인권협회만큼 성공한 단체는 없다. 이들에 의하면 최근의 정치범 재판은 감방 안에서 진행되었다. 당연히 변호사도 없고 가족의 참관도 없다. 적십자사는 3년 전부터 정치범 면회를 금지당했다. 유엔인권 특사는 당국이 지정한 감옥만 겨우 방문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인권그룹 지도자 데이비드 매티슨은 미얀마 인권 단체의 줄기찬 노력 덕에 마침내 국제 인권 단체의 관심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활동은 매우 지속적이고 치밀하고, 그래서 효율적이다. 지난해 9월 국제인권감시기구는 이 협회에 인권보호상을 수여했다.


Trackback 0 Comment 0
2009/02/17 10:42

[여적]독재자 차베스

수많은 독재자들이 명멸했다. 영국의 독재자료 사이트 ‘딕테이터 오브 더 먼스’는 히틀러와 스탈린, 무솔리니를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았다. 나름대로 ‘독재지수’를 계산한 결과다. 이 지수는 대중의 증오도, 외교정책의 위험도, 압제의 정도, 국내 희생자의 수 등을 종합해 산출했다. 4~6위는 마오쩌둥, 호찌민, 프랑코였고 김일성은 10위에 올랐다. 김정일과 박정희도 각각 16·17위였다.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독재자 순위는 생존자를 대상으로 한 것인데 김정일이 1위, 수단의 알 바시르 대통령이 2위, 버마의 탄슈웨 장군이 3위다. 압둘라 아지즈 사우디 왕세제가 4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5위,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이 6위로 나타났다.

이런 독재순위나 지수 따위는 숫자놀음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해당 국민들에게는 무엇보다 심각한 현실이 된다. 지도자의 독재지수는 뒤집어 말하면 민중의 고통지수를 뜻한다. 민주주의가 결코 낡은 가치로 취급될 수 없고 그래서 안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에 성공하면서 당장 독재 강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딕테이터…’ 사이트 식으로 보면 ‘독재지수’가 급등했을 법하다. 그는 “2027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싶다”고 한다.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 가속화, 국가자산 매각 금지, 에너지 부문에 대한 국가통제 확대 등 ‘차베스식 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나 쏟아지는 국내외의 시각은 그렇게 우호적이지 못하다. 이미 10년을 집권한 차베스가 종신집권욕에 빠졌다는 의심 때문이다.

우리는 유엔 총회에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악마라고 부르며 ‘반미의 선봉장’ 노릇을 하던 차베스를 기억한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독설에 후련해 하기도 했다. 그 차베스마저 수없이 명멸한 독재자들의 반열에 드는 것 아닌가. 차베스는 민주주의 신봉자를 자처해 왔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언론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독재자의 면모로 ‘민주독재자’란 이름을 얻기도 했다. 예전에 의회가 자신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데 대해 “볼리바르주의 혁명 완수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했지만 불길함은 남는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한다며 유신헌법을 강행한 박정희가 생각나는 것이다.

<김철웅 논설위원>
Trackback 0 Comment 0
2009/02/02 10:58

전쟁의 눈물 쫓아 20년…그녀는 ‘다큐 독립군’

» 분쟁 지역 취재를 위해 오지를 떠돈 강경란 피디가 5부작 다큐 <인간의 땅>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강 피디가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자신의 사무실에 붙은 <인간의 땅> 포스터 앞에서 웃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반군·탈레반에 3번 붙잡혀 수차례 ‘죽을고비’
“눈앞이 하얘져요…전쟁터 체질 아니거든요”

‘국내최초’ 수식어 따라붙는 158cm 작은 거인
오바마와 61년생 동갑 “나이도 잊고 살았네요”

강경란(48) 분쟁 전문 다큐 피디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다큐 경력뿐 아니라 연예인처럼 키와 몸무게가 뜬다. 158㎝, 46㎏. 작은 체구이지만 그는 국내에서 세계의 전쟁터를 누벼온 분쟁 전문 저널리스트 가운데 ‘거인’으로 꼽힌다. 20여년간 아프가니스탄·버마(미얀마)·이라크·팔레스타인·코소보·인도네시아·네팔 등 ‘세계의 화약고’를 두루 누볐다. 국내언론 최초로 버마 민주화 인사인 아웅산 수치 여사와 캄보디아 현직 총리인 훈 센을 인터뷰했고, 탈레반이 파괴한 세계적인 불교유적 바미안 석불의 현장을 국내에 처음 보도하기도 했다.

그가 이번에는 대형 다큐를 가지고 전선에서 돌아왔다. 무려 2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친 5부작 다큐 <인간의 땅>이다. 한국방송에서 곧 방영할 예정이다. 설을 앞둔 지난 21일 오후 마주한 강 피디는 “편집 작업을 하느라 이번에도 고향에 내려가기는 글렀다”며 웃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에 파묻혀 살아온 그의 눈빛은 생각과 달리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는 “빗발치는 포탄과 총알이 아닌 그곳 사람들의 눈빛을 보러 다녔다”고 말했다.

-이번엔 다섯 편짜리 큰 기획이네요?

“2년이 넘게 걸린 다큐들이에요. 다섯 나라를 담았지요.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이 있는 정글의 버마, 네팔, 방글라데시, 이라크의 쿠르드…. 기획안을 낼 때 취재기간 동안 역사적 변화, 굵직한 사건들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적중했어요. 아프가니스탄도 그렇고 버마도 그랬죠. 그런데 버마는 샤프란 혁명이 그렇게 크게 터질 거라곤 예상을 좀 못 했죠. 아프간에서도 (샘물교회) 인질만 안 죽였으면 했는데….”

그렇게 찍어 쌓인 비디오테이프가 30분짜리로 모두 1500개다. 2007년 봄 제작이 본격 시작돼, 꼬박 2년이 넘게 걸렸다. 마오 반군과 성매매 여성으로 갈린 네팔의 자매, 탈레반과 정부군으로 나뉜 아프간 형제의 영화 같은 삶이 담겼다. 무관심과 이기심 속에 사라져가는 소수민족, 빈곤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시아 사람들의 모습들이 아프게 펼쳐진다.




그가 다큐멘터리 일을 시작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1980년대 중반 대학원을 마치던 해 여름에 케이엔시시(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국제·평화 문제를 다루는 일을 했죠. 그러다가 88~89년 무렵에 우연히 케이비에스에서 전문리서처 같은 일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 한국전쟁 다큐를 만들고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어깨너머로 방송 어떻게 돌아가나 배우고 그랬죠. 대선배 한 분이 케이비에스를 그만두고 나갔는데, ‘몽골리안 루트’라는 기획을 들고 엠비시 프로덕션으로 나갔죠. 최근에 방영된 건데 그 기획이 되게 오래된 거예요. 그때 나를 불렀고, 제가 미국 쪽 헌팅을 하면서 석 달 정도 미국에서 열심히 놀았지요.”

그러다가 제일기획에서 다큐전문 큐채널을 만들게 되고, 지인의 소개로 입사해 조직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됐다.

“90년대 초반쯤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마음대로 하면서 참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큐채널이 삼성 영상사업단으로 가면서 얼마 안 돼 그만뒀지요. 1년 반 정도 있었는데 오래 있었던 거죠.”

-조직 생활이 잘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체질에 잘 안 맞아요. 큐채널 초창기만 해도, 하고 싶은 거 다했는데, 영상사업단 가면서 돈 많이 드는 것에 대해서 조금씩 견제 들어오고, 기다리라 하고, 결제라인 길어지고 하면서…. 내가 하는 건 시사성 있는 다큐라서 (일이) 터지기 전에 가 있어야 하는데,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유고사태 때 유고에 들어가려고 2~3주씩 마케도니아에서 기다리고 그러는데, 위에서 그게 말이 되냐고 하면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강 피디는 분쟁 전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게 의도된 건 아니라고 했다.

“처음부터 분쟁을 다뤘던 건 아니죠. 아웅산 수치 여사를 좋아해서 한번 만나봐야겠다 해서 버마로 갔어요. 그런데 안 만난 것만 못하게 돼버렸지요. 좀더 카리스마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이길 바랐죠. 아웅산은 자꾸 ‘다이얼로그’를 얘기하는데, 내가 보기엔 대화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화를 화두로 잡고 가는 게 답답한 거예요.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으면서 희생하길 바랐어요. 그러다가 버마 분쟁지역을 계속 돌아다니게 되고, 점점 더 주제들이 전선으로 모이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그는 뜻밖의 얘길 했다.

“근데 사실, 난 전선 체질 아닙니다.”

-의외네요. 어떤 면이 그런가요?

“나 되게 무서워해요. 마음속으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총을 수없이 잡아봤는데 한 번도 방아쇠를 당겨본 적은 없어요. 분쟁지역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총을 주면서 한 번 쏴봐, 그러거든요. 방아쇠에 손가락이 가잖아요? 거기서부터는 딱 막혀요. 전쟁터를 가면, 그런 딱 막힘, 막아서는 지점이 있어요. 그걸 뛰어넘기가 정말 어려워요.”

-그런데 어떻게 20년간 전쟁터만 돌아다녔나요?

“포탄 날아가는 것을 취재하러 가는 게 아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의 답답함을 찍으러 가는 겁니다. 처음에 이슬람 지역 사람들, ‘인샬라’ 얘기하는 거 너무 싫었어요. 특히 팔레스타인 가면 그러죠. 수천 년 동안 그들을 도와주지 않은 신인데. 요즘엔 이런 게 이해가 좀 돼요. 너무너무 대안이 없을 때, 정말로 막바지에 가면 나오는 게 인샬라고 신이죠. 그러면서도 늘 감사하잖아요. 오늘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요. 진정한 행복이에요.”

-연민도 있지 않을까요?

“내 앞에 죽어가는 사람들 병원으로 데려가는 일이 아니라, 어차피 저널리스트 바닥에 들어왔다면 다른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없을까, 그런 게 처음엔 고민스럽지요. 캄보디아에서 폴포트 막판 시절이었어요. 시내에 폭탄이 터져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내 옆에 있던 카메라맨이 병원까지 데려간 일이 있었죠. 그거 가지고 우리끼리 논쟁이 붙었어요. 니가 할 일이냐 그게, 니가 해야 할 일은 찍는 거다, 하면서요.”

-반군이나 탈레반한테 잡힌 적도 있다면서요?

“세번 잡혀봤어요. 그런데 아무 생각 안 나요. 눈앞이 허예지는 거 있잖아요, 일사병처럼. 그리고 거기 사람들은 이런 게 일상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죠.”

-이라크 전쟁 때도 위기가 있었지요?

“2003년 4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함락하던 날, 우리나라 방송 기자들과 함께 요르단에서 이라크 쪽으로 국경을 넘고 있었어요. 영국 <비비시>(BBC) 취재진하고 모두 7대 차량이 함께 들어가고 있었죠. 그런데 차들이 주유소로 들어섰어요. 화장실 때문이었는데, 저만 빼고 모두 남자들이라서 제가 마지막으로 화장실엘 갔죠.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뒤에서 총소리가 ‘따다다’ 나는 거예요. 얼른 뛰어나왔는데 내가 탔던 한국 차들은 다 도망가고, 총 든 이라크 남자들이 쫙 깔렸더라고요. 총 든 남자들이 도망가지 않은 비비시 애들을 차에서 끌어내 막 굴리고 있더군요. 한국 보도진 차는 다 가버렸으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일단 무장 게릴라들에게 가야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배짱 좋게 그쪽으로 갔죠. 그런데 총 든 남자들은 저한테 신경도 안 쓰고 지들끼리 막 싸웠어요. 통역에게 물어보니까 미군이 오폭해서 사람들이 몰살당했는데 그걸 보도해 달라고 비비시에 요구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비비시 통역이 바그다드에 더 많은 희생자들이 있다며 우리는 그걸 보도해야 한다며 그들을 설득했죠. 설득이 먹혀서 비비시 차가 막 출발을 하는데, 그때 덩치 큰 아저씨가 날 확 잡아당겨 자기 무릎 위에 태워줬어요. 비비시 차가 완전 만원이었거든요. 그들이 절 놔두고 갔으면 저는 여기 없을지도 몰라요. 나중에 바그다드에 와서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니가 좀 더 뚱뚱했더라면 아마 널 못 태웠을 거라고.”

강 피디는 결혼도 안 했고 집도 없다. 모아둔 돈도 별로 없다고 한다. 나이에 맞춰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평범한 삶과 달리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결혼은 왜 안 했어요?

“못 한 거죠. 이제는 사람 만난다는 게 힘들어요. 새로운 일이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거든요. 옛날에는 한 번도 안 가보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공항에 내려서도 힘겹다 두렵다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택시 기사 잡아서 호텔 가고 여행사 통해서 통역 섭외하고, 그걸 통해서 하나씩 풀어나가는,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기’를 해냈는데, 지금은 어딜 간다 그러면 겁이 나요. 편집도 어렵죠. 현장에선 상황이 힘들게 돌아가고 정신없고 해서 큰 윤곽으로 이해하고 디테일을 놓치잖아요. 그런데 필름을 다시 보면 되새김을 하게 되잖아요. 숨이 꼴랑꼴랑 넘어가면서도 정말 살고 싶어서 그러는 눈빛들이…. 그게 다 보여요. 스물도 채 안 된, 살아남은 여자들이 애들 줄줄이 딸려서 꺼이꺼이 우는 모습 보면 저 여자 인생이 어떨까, 정말 먹먹해져요.”

20여년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을 뛰어다닌 강 피디는 이제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마침 그 또한 이번 <인간의 땅>을 마무리하고 당분간은 박사 논문 작업과 책 쓰기에 매달릴 계획이라고 했다.

“난 내 나이도 잘 모르고 살았어요. 오늘 오는 길에 라디오를 들으니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61년생이라면서요? 마흔아홉살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내 나이가 그렇게 들었나, 깜짝 놀랐어요. 내가 61년생이거든요. 그런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좀 복잡해졌지요.”

하지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얘기가 나오자 그의 눈은 다시 반짝였다.

“한참 <인간의 땅>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자에 있는 정보원한테 전화가 왔어요. 일이 터지기 직전이라고 오려면 어서 오라고요. 하지만 5부작 편집 작업을 해야 해서 가질 못했죠. 그러고 나서 의자에 앉아서 편집하고 있는데 일이 손에 잡히질 않더라고요. 내가 그냥 가서 서 있기라도 해야 하는데….”


» 분쟁지역 전문 피디 강경란씨

“분쟁지역에 터 잡고 장기 다큐 찍고싶어”

강경란 피디는 이화여대 사회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20여년간 프리랜스 피디로 활약하면서 아프가니스탄·버마·이라크·팔레스타인·코소보·인도네시아·네팔 등 세계의 오지와 분쟁지역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1989년부터 한국방송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해왔고 다큐 전문 <큐채널>에서 국내 최초로 버마의 민주지도자 아웅산 수치를 단독 인터뷰하는 등 분쟁 전문 피디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독립 다큐 전문 프로덕션인 에프엔에스(FNS)를 차리고 나서는, 탈레반이 파괴한 세계적인 불교유적 바미안 석불의 현장을 국내에 처음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강 피디는 “요새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사 논문을 마치고 책 쓰기 작업을 마친 뒤에는 (아시아 분쟁 지역 등지에)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장기적인 다큐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