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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1 버마 어린이도서관을 위한 이야기마당 "안녕, 버마"
  2. 2010/07/16 버마 작은 나무 소식(6월)
  3. 2010/06/23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 이름은 야 인마… 툭하면 맞아도 꿈☆ 포기 못해”
  4. 2010/06/23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1)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
  5. 2010/06/05 "버마 작은 나무 소식(4~5월)" (6)
  6. 2010/05/08 미얀마 ‘수치여사 정당’ 강제 해체
  7. 2010/05/08 <사람들> 미얀마 소년가장 후원 서홍기 상병
  8. 2010/05/08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2010.05.07 제809호]
  9. 2010/03/30 민주주의 우물파기, 버마 총선과 국민의 선택
  10. 2010/03/20 유엔 인권조사관, 버마의 제도적 유린행위 비난
  11. 2010/03/20 만화로 만나는 ‘버마 이야기’ (1)
  12. 2010/03/11 미얀마 군정, 수치 여사 출마 차단
  13. 2010/03/11 美 "버마 선거법, 민주주의 조롱" 비난
  14. 2010/03/11 세계여성의 날, 버마여성난민을 위한 바자회
  15. 2010/03/11 美 "北, 버마에 核·무기 수출 가능성 우려"
2010/07/21 15:53

버마 어린이도서관을 위한 이야기마당 "안녕, 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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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6 23:51

버마 작은 나무 소식(6월)

책상 옮김

6월부터 마포역 근천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했어요.

저는 치과 선생님들이 저녁에 세미나 하는 방을 낮에 사무실로 쓰고 있어요.

그 사무실에 새로운 단체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함께 준비하고 있는

분들은 직장인들이라서 사무실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요.

하지만 놀러오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행복했어요.

 

준비 모임은 ‘마웅저와 함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요. ‘마웅저와 함께’는

2004년부터 지인들이 만든 모임 이름이에요.

그는 새로운 단체의 이름을 만들기 전까지 쓰기로 했어요.


요리사 준비

오는 7월 25일 ‘버마 어린이 도서관을 위한 이야기 마당’행사

준비 모임에 계속 참여하고, 그 행사에 ‘마쉐프의 버마 카페’를 맡았어요.

저는 다른 것은 못하지만 요리는 잘 한답니다. ㅋㅋ


평화 기원

6월 20일 저는 버마 활동가들, 버마 이주민들, 한국 사람들과 함께

‘아웅산수지’ 여사 65세의 생일을 맞아 버마 시민들의 평화를 향한

행사를 부천에서 열었어요.

인터뷰

6월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에요.

보통 한국 언론에서 난민에 관한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세계의 난민의

날을 맞아 기사가 나왔어요. 어떤 신문에서 저의 인터뷰가 나왔고,

6월 21일 MBC라디오 ‘박혜진이 만난 사람’에서 난민과 관한 내용을

다른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했어요. 난민 인정자인 마웅저가 시민단체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좀 나왔어요.  심심할 때 들어보시길 -_-;; 


저희도 시장

7월 1일 부천시장 취임 행사에 참여했어요. 저희(난민)들에게 투표권이 없지만 부천에

사는 한 시민으로 부천 시민들이 뽑는 시장은 저의 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했어요.

 

그 전 6월 15일에 저는 ‘부천시장 인수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을 받았어요. ㅋㅋ

김만수 시장님께서 ‘시민이 시장입니다’라고 하셨어요. 그럼 저도 시장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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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16:45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내 이름은 야 인마… 툭하면 맞아도 꿈☆ 포기 못해”

난민으로 살기

미얀마에서 온 마웅저(41)가 한국에서 얻은 첫 직장은 인천의 한 도색 공장.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50만원을 받았다. 한국인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야 인마.” 이게 공장에서 마웅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결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함께 일했던 미얀마 친구는 걸핏하면 사장에게 얻어맞았다. 7개월을 일했는데, 월급은 5개월치밖에 못 받았다. 이듬해 경기 부천의 구두 형틀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지만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한번은 TV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료가 채널을 돌렸다. “너 같은 건 우리나라 여자 쳐다볼 자격이 없어.”

▲ 세계 난민의 날을 이틀 앞둔 지난 18일 서울 노고산동 소극장 소통홀에서 열린 난민콘서트에서 난민지위인정자와 난민신청자 등이 박수를 치며 공연을 즐기고 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힘겨운 난민의 삶

2000년에는 정식으로 난민 신청을 했다. 법무부로부터 신문과 비슷한 인터뷰를 받았지만, 돌아온 것은 ‘불허한다’는 통지. 그것도 신청한 지 5년이 지나서였다.

법원은 다행히 마웅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법무부는 계속 상소를 하며 ‘발목’을 잡았다. 결국 2008년 대법원에서 승소하면서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하늘의 별을 땄다.” 난민으로 인정된 직후 어떤 기분이 들었느냐고 묻자 마웅저는 이렇게 말했다.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줌머족’ 로넨(42)의 삶도 ‘코리안 드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택시를 탔다. 외국인인 걸 눈치챈 기사. “어디 가냐?” “5000원이다. 내놔.” 서른을 훌쩍 넘긴 로넨이었지만, 초등학생 대하듯 했다. 난민 인정에 인색한 정부 탓에 처음 몇 년간은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공장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지리아 선교사 빅토르(가명·46)는 우리나라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입국과 동시에 난민신청을 했지만 불허됐고, 1심 재판에서도 졌기 때문이다. 위협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찰이나 무슬림으로 추정되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다. 8월 2심 재판이 열리지만, 결과가 바뀐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내 이름은 (나이지리아) TV에도 많이 나왔기 때문에 돌아가면 바로 들킨다. 한국 정부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미얀마 출신 코와인(42)은 원래 변호사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공장 행을 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일을 해서는 안 됐다. 난민 신청 기간 중에는 취업이 금지돼 있기 때문. 하지만 난민 신청을 한 지 4년이 지나도록 결과를 받지 못했다. “I need too much money for living expenses, so should I work.(생활비 때문에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코와인이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은 하소연이었다.

●‘꿈’을 안고 대한민국으로 왔지만

1988년 8월8일. 세계사에 ‘8888 버마민중항쟁’으로 기록된 날이다. 수도 양곤의 고등학생이었던 마웅저. ‘군부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대학생 형, 스님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목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쳤다.

항쟁은 서슬 퍼런 군부의 총부리에 밀려 실패했지만, 마웅저의 투쟁은 계속됐다. ‘버마전국학생연합(ABSFU)’에 가입해 ‘지하운동’을 했다. 탄압이 시작됐다. 생사를 함께하기로 결의했던 동료들은 하나 둘 경찰에 잡혀갔다. 이름을 바꾼 채 공사판을 전전해야 했다.

어머니와 다름없던 누나가 마웅저를 부른 것은 1992년. “망명해라.” “여권도 비자도 없는데….” “브로커를 쓰자. 돈은 내가 댈게.” 누나는 푼푼이 모았던 21만차트(Kyat·미얀마 화폐단위)를 내놓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350만원쯤 된다. 큰돈이다. 마웅저는 대한민국을 골랐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8888항쟁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마음이 끌렸다. 2년 뒤 마웅저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이 미얀마 민주화를 도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줌머족’ 로넨은 ‘인종 청소’를 하는 정부에 맞서 무장단체에서 활동했다. 산악지대인 치타공에서 종족의 생존을 걸고 싸우다 체포됐다.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마을로 돌아왔지만, 탄압은 더 심해졌다. 마을에는 1㎞마다 하나씩 검문소가 들어섰다. 대원들은 지나가던 사람들을 ‘심심하면’ 때렸다. 1999년에는 대규모 약탈과 방화가 있었고, 여성들이 집단으로 성폭행당하기도 했다.

로넨은 이듬해 고향을 떠났다. 한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한국으로 왔다. 한국인이 같은 몽골계고, 불교신자가 많다는 점에 끌렸다. 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한 중견국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전사(戰士)’가 아닌 ‘시민(市民)’으로 살 수 있다는 꿈이 가슴을 매웠다.

빅토르는 나이지리아 ‘오순절협회(PEN)라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강연에 나가 나이지리아의 부패한 경찰을 강하게 비난했다.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고 있는 일 그만둬라.” “누구냐?”고 물으면 끊었다. 험악한 인상을 한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가족을 위협했다. 운전기사가 괴한에게 폭행당하고 차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는 2005년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미국을 생각했지만, 총이 없는 한국을 선택했다. 기독교도가 많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가족들도 불러 ‘제2의 삶’을 꾸릴 계획이었다.

●여전히 꿈 키우는 난민들

그러나 난민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먹고살려는 게 아닌 신념과 양심, 존엄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인 만큼, 다양한 활동을 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마웅저는 1998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끌고 있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미얀마 대사관 앞으로 가 시위를 하고, 틈 날 때마다 길거리로 나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미얀마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2004년부터는 우리나라 시민단체에서 활동했고, 다음달에는 자신이 직접 단체를 만들 예정이다. 단체명은 ‘버마민주화를 돕는 단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한국인 동료 100여명이 함께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코와인은 2003년 인천에 작은 미얀마 불교 사찰을 세웠고, NLD 회원들과 민주화운동에 쓸 자금을 모으고 있다. 국내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화요일에는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주한미얀마 소수민족 연합회’ 회장이기도 하다. 한때 대사관이 그를 외국환거래법을 위반했다는 트집을 잡아 검찰에 고발했지만,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카카나(27·여)는 얼마 전부터 일요일에는 출근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나오라고 해도 “절대 안 된다.”며 버틴다. 일요일만큼은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에 나가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말을 어느 정도 익히면 미용기술을 배울 계획이다.

빅토르는 한남동의 한 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강제 송환을 당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할 것이다.

동생이 정치 운동을 하는 바람에 연좌제에 걸려 2005년 한국에 온 쇼네(가명·40·토고)는 8월 둘째를 낳는다. 병원비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최근 난민에게도 의료 혜택을 확대하는 정책을 발표해 시름을 놓았다. 새로 태어날 아이는 한국을 보고 느끼며 자랄 것이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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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16:41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1)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

“戰士 아닌 시민으로 살고싶다”

‘다문화 사회’가 유행어처럼 번지지만 다문화인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아득해 보인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다문화 사회를 설계하기 때문이다. 실천 없는 구호처럼 다문화 정책이 헛도는 이유다. 서울신문은 다문화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싣는다. 1회는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이다. 국제사회가 다문화 사회에 주목한 것은 전 세계가 난민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부터다. 우리나라도 한국 전쟁으로 유민 사태를 겪었다.

▲ 이 여성과 아이의 눈에 서린 것은 불안일까, 희망일까. 난민 인정을 받은 미얀마 출신의 라헤나가 18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난민인정자 가족초청간담회에 참석해 법무부의 난민정책을 유심히 듣고 있다.
김태웅기자 tuu@seoul.co.kr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대중 전 대통령….’ 그들도 한때 난민이었다.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박해를 당해 조국을 탈출해 낯선 땅으로 망명했다. 자유를 향해 떠나온 순례자를 낯선 땅은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부는 ‘제2의 조국’에 공헌하며 여생을 보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우리나라에도, 희망을 품고 찾아온 난민들이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20일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을 문답으로 정리했다. 난민 신청을 하거나 인정을 받은 마웅저(미얀마) 로넨(방글라데시) 빅토르(가명·나이지리아) 카카나(방글라데시) 코와인(미얀마) 쇼네(가명·토고) 등 6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일부는 안전상 이유로 가명을 요청했다.

→조국을 왜 떠났나.

전사(戰士)가 아니라 시민(市民)으로 살고 싶었다. ‘인종 청소’를 하는 방글라데시 정부에 맞서 생존을 위해 피 흘리며 싸웠다. 약탈과 방화, 성폭행이 일상인 나라에서 한 살배기 아들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왜 한국을 선택했나.

민주주의를 이뤄낸 나라가 아닌가. 군부 독재를 시민이 무너뜨렸고,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8888 버마민중항쟁’과 비슷해 민주화 과정을 배우고 싶었다. 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한 국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라는 믿음도 있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라면 국제인권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민이 됐나.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걸 우리는 “하늘의 별을 딴다.”고 부른다. 대한민국의 난민 인정률은 8.7%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유엔 난민협약 가입국 가운데 최하위다. 법무부에서 불인정 처분을 받고 행정소송을 냈다. 법원이 승소 판결했는데 법무부가 대법원까지 상소했다. 8년 만에 별을 땄다.

→심사가 까다로운가.

무성의하고 무관심하다. 전문 통역인도 없고 난민 국가의 상황도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의 불법 체류를 단속하는 법무부 직원들이 면담을 하니까 당연하다. 다른 나라는 외교부가 난민을 인정한다. 직원은 ‘한국에서 일하고 싶으면 그냥 일하다가 잡히면 되는 거지, 왜 난민 신청을 하느냐.’ 이렇게 묻는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박해받을 조국으로 내쫓기지 않으니 내 목숨을, 가족의 삶을 구한 거다. 그게 고맙다. 외국인 차별은 심각하다. 취업지원이나 쉼터 제공이 없어 힘들다. 아인슈타인도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면 공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아이는 박해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서 자랄 수 있다.

→무엇을 꿈꾸는가.

미얀마 군부 독재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싶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작은 불교 사찰을 세워서 민주화 운동에 쓸 자금을 모으고, 국내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강제송환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않을 것이다.

정은주·임주형기자 ejung@seoul.co.kr

[용어 클릭]

●난민 인종, 종교, 국적, 극심한 빈곤, 정치적 의견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고, 그로 인해 조국을 떠난 사람들을 말한다. 1951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1967년 ‘난민 지위에 관한 의정서’ 등 국제법으로 국제사회는 난민을 보호한다. 우리 정부는 1992년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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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5 23:21

"버마 작은 나무 소식(4~5월)"

  이제 태국-버마 국경지역에 다녀 온지 3개월이 되었네요.

태국에 다녀와서 놀고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아요.

전에도 놀고 있지만 요즘은 더 놀고 있다는 말이에요. ㅋㅋ


축하해 주셔야하는 일이 있어요.

저는 그 동안 자동차 운전학원에 다니며 면허를 땄어요. 필기시험과 같은 시험들이

어려웠지만 난민으로 살고 있는 저에게는 공무원들과의 관계가 더 힘들었어요. ㅎㅎ

2008년 말에 하늘에 한 별을 땄어요.(난민 인정- 증면서)

2010년에도 하늘에 또 하나의 별(운전면허)을 땄다고 느껴질만큼 큰 일이었어요.


지난 4월은 버마의 새해라서 한국에도 버마의 신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동료들과 함께 했어요.

보통 주말에는 동료들과 지내고 있어요. 평일이라면 지인들을 찾아뵙거나

동료들과 함께 버마 군부독제 대사관 앞 기자 회견, 일일 시위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자주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3주내내 외대 “동남아시아 사회와 문화”수업에

강연도 했어요. 오래전부터 청소년과 대학생들에게서 배우고 했던 것들을

이제 어딘가에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또 이주민 좌담회에 참여해서 난민의

삶에 대해 발표했을 때 이주 결혼 , 중국동포 등과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저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번역하는 일도 하고 있어요. 20페이지 정도 있는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자료를

번역하면서 10년 전부터 해온 이주 인권 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한국 내 이주민들의 앞으로가야하는 먼 길에 대해도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한국 노동자 운동의 역사와 이주민 운동의 역사를 군부 독재 아래에서

살고 있는 버마 시민들에게 알려줄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계획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 싶었어요. 한국과 태국에 왕래하면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지인들의 도움으로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어요.

또한, 9월 “이주운동 활동가 독일 연수”(13박 14일)참여하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어요. ㅋㅋ.


행복하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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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8 15:32

미얀마 ‘수치여사 정당’ 강제 해체

22년간 민주화운동 상징
前대변인 “이달 신당 창당”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65)가 이끌던 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6일 창당 22년 만에 강제 해체됨에 따라 수치 여사 지지자들은 신당 창당을 추진하기로 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킨 마웅 스웨 전 NLD 대변인이자 의사결정 대표위원은 7일 “이번 달까지 새로운 정당을 등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정당 이름조차 정하지 못했으며 군사정부가 10, 11월경 실시하는 총선 출마 여부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NLD는 해체됐지만 NLD와 수치 여사의 신념을 지켜나가면서 미완의 정치적 의무를 계속 이행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NLD는 올해 총선부터 적용되는 새 선거법에 반발하며 총선 보이콧을 선언했다. 3월 미얀마 군사정부가 총선에 수치 여사가 참여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했기 때문이다. NLD는 ‘총선에 참가하려는 정당은 6일까지 등록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새 선거법상 규정을 이행하지 않았고 결국 이날 강제 해체됐다. 이로써 1988년 창당해 군정 탄압에 맞섰던 NLD는 22년간의 민주화 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정치범이자 NLD 창설멤버였던 윈 틴 씨(80)는 프랑스 라디오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결정이 미얀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치 여사는 지난주 새 선거법에 대한 무효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선거법이 이미 시행됐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기각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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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8 15:25

<사람들> 미얀마 소년가장 후원 서홍기 상병

미얀마 소년가장 후원 서홍기 상병 (논산=연합뉴스) 군에서 받는 8만원 남짓의 많지 않은 봉급을 아껴 지난해 10월부터 '월드비전'을 통해 미얀마의 소년가장 기마(15) 군에게 정기적인 후원금을 보내고 있는 육군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 서홍기(25) 상병. 2010. 5.4 <<육군 훈련소, 지방기사 참조 >> jchu2000@yna.co.kr

(논산=연합뉴스) 정찬욱 기자 = "한국의 군인 아저씨가 보내주는 돈과 격려가 저희 가족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어요"

육군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 서홍기(25) 상병은 군에서 받는 8만원 남짓의 많지 않은 봉급을 아껴 지난해 10월부터 '월드비전'을 통해 미얀마의 소년가장 기마(15) 군에게 정기적인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매달 3만원씩이지만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해외의 어린이들에게는 큰 돈이다.

서 상병은 5살 때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해외로 나가 봉사활동을 접하게 됐고 14살 때부터 캄보디아에서 '사랑의 집짓기' 모금활동으로 본격적인 봉사를 시작했다. 19살때 귀국한 이후에도 방학을 이용, 캄보디아의 초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군에 입대해서도 먹고 싶은 간식이나 담뱃값을 절약해 생활이 어려운 해외 어린이에 대한 후원활동을 계속했다.

서 상병의 후원활동은 기마군이 최근 부대로 보내 온 감사 편지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편지에 아름다운 꽃을 함께 그려 보낸 기마군은 "홍기 형이 보내주는 돈으로 혼자 계신 어머니와 5명의 동생을 부양하며 학교에도 잘 다니고 있다"며 "어렵고 힘들지만 이런 도움과 격려가 큰 힘이 되고 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서 상병은 "작은 도움이었는데 기마 가족에게 큰 힘이 됐다니 정말 기쁘다"며 "제대후 사회에 나가서도 더 많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jchu20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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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8 15:22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2010.05.07 제809호]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
‘보복-응전-전면전’으로 치달았을 가능성… 통제 불가능한 상황 막으려 미국이 군정을 실시했을지도


» 1983년 10월9일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는 현대사에 비극의 한 장면으로 남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안정에는 적잖은 도움을 줬다. 테러 직전 아웅산 묘역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수행장관들. 연합
“쾅!”

1983년 10월9일 오전 10시23분, 버마의 수도 랑군(지금의 양곤) 중심지의 아웅산 묘소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이 일어났다. 묘소의 지붕이 산산조각났고, 자욱한 연기와 먼지 속에서 비명과 고함 소리가 울렸다. 한국 대통령을 태운 리무진은 현장 도착까지 5분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다급하게 차를 돌렸다. 잠시 뒤, 얼굴이 사색이 된 경호원이 달려와 장세동 경호실장에게 보고했다. “죽었습니다. 모두, 모두 다··· 죽었습니다!”

전방 찾은 전두환 “내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

‘아웅산 묘지 폭파 사건’은 건국 이래 대한민국 대통령을 노리고 벌어진 암살 기도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이었다. 해외, 그것도 버마의 국부로 추앙받는 아웅산이 묻혀 있는 성역에서 벌어졌다는 점, 비록 ‘실패’했지만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장관급 5명이 목숨을 잃고 여기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심상우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민·관의 희생자가 21명(버마인 4명 포함), 부상자가 46명(버마인 32명 포함)에 달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6개국 순방에 나선 길이었으며, 버마는 그 첫 순방국이었다. 버마는 한국과 교류가 거의 없는 나라였다. 이 사건이 터지고서야 비로소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들이 많을 정도였다. 표면상 중립을 표방했지만 북한과 친근한 나라였다. 그래서인지 사건이 터지자마자 “북한의 소행이 분명하다”는 우리 쪽 주장에 대해 버마 정부는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고, 남한의 반정부 세력이 벌인 테러가 아니냐며 반문했다. 남한 쪽 자작극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당시 묘역에서 나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는데, 나팔수들을 조사해보니 “한국의 경호원들이 나팔을 불라고 하기에 불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 직후 검거된 용의자들을 수사하던 버마 경찰은 10월17일 중간보고에서 이들이 북한 공작원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후 11월4일 최종 수사 발표를 거쳐 11월6일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고 북한 외교관을 추방하는 버마의 조처가 있었고, 범인들은 12월9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진용진은 1985년 처형되고 강민철은 2008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서둘러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은 10월10일 공항에 내려 “명백한 북한의 도발이며, 반드시 단호히 응징할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냈다. 그리고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비상국무회의와 국정자문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호한 응징’의 기세는 줄고, 외교적 수단으로 대응한다는 쪽으로 입장이 정리됐다. 당시 군부에서는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전면전을 벌이든지 최소한 우리도 암살단을 보내 김일성을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다. 휴전선에 접한 육군 1군단과 6군단은 상부의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병사들을 완전무장시키고 북진할 준비를 마쳤으며, 최근 밝혀진 대로라면 육사 12기를 중심으로 하는 장교집단이 ‘벌초계획’이라는 이름의 김일성 암살 작전을 세우고 모의훈련까지 마친 다음 대통령의 승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특수부대 30명을 평양에 투하해 주석궁을 폭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반발에 그는 직접 전방 부대를 찾아다니며 지휘관들을 설득 내지 위협했다고 한다. “내 명령 없이 한 사람이라도 움직였다간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그리고 10월1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희생자 장례식을 치르고, 20일에는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무력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남북 모두에 오히려 전화위복

이처럼 사상 초유의 테러 피해를 입고도 당시 한국 정부가 예상보다 온건하게 대응한 배경에는 미국의 태도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전투 준비 태세를 의미하는 데프콘3을 발령하고, 7군 함대와 조기경보기를 포함한 공군 세력을 한반도에 급파하는 등 상당한 대응 조처를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워커 대사를 비롯한 여러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무력 대응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취한 조처 역시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미국 국가안보회의 소집),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데프콘3보다 한 단계 높은 데프콘2 발령) 때에 비하면 강도가 약했다. 미국이 직접 연루된 사건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우방국 국가원수가 암살을 가까스로 모면하고 각료 다수가 살해됐어도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실질적인 대응 조처를 취할 뜻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굳건히 다짐으로써 한국의 불안을 무마하고, 차제에 한·미·일 삼각 방위체제를 강화해 동북아시아에서 신냉전 구도를 확립하려 했다.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에서 공산 진영과 맞서는 자유 진영 국가로 한 배를 탄 셈이었으나, 영토와 역사 문제 등으로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10월28일 한국 정부가 한·미·일 군사 안보 체제를 새롭게 추진한다고 발표했고, 일본도 공직자들의 북한 방문을 불허하고 제3국에서의 외교 접촉을 중지하는 등 어느 때보다 강경한 대북 조처로 화답했다. 또한 미국은 해외 전략상 한반도를 2급에서 1급 중요 지역으로 격상시켰다. 2급은 재래식 전력에 의해 방어해야 하는 지역이며, 1급은 핵무기를 사용해서라도 방어할 지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11월12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함으로써 박정희-카터 사이에서 한껏 냉랭해졌던 한-미 관계가 어느 때보다 돈독해졌음을 과시했다.

국내적으로도 아웅산 사건은 정권에 ‘전화위복’으로 작용한 셈이었다. 1983년은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 억눌렸던 정치의식이 정권 전복 직전까지 달아오른 시기였다. 1982년 ‘장영자 사건’으로 초대형 권력형 비리 의혹이 불거지고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으며, 1983년 초에는 김영삼의 민주화 요구 단식투쟁이 20일 동안 진행되는 등 사회 분위기가 갈수록 심상치 않았다. 여기에 1983년 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의 공격으로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다시 얼마 뒤 아웅산 사건이 일어났다. ‘공산 괴뢰집단의 국가 전복 음모’가 현실적으로 와닿는 분위기에서 독재의 불편함이 잠시나마 잊히고, 다시 한번 ‘반공으로 총화단결’하는 분위기가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이 테러의 ‘실패’로 북한은 버마를 비롯해 제3세계 여러 국가에서 국교 단절 및 외교적 비난 조처를 당했다. 따라서 1970년대 말부터 군사·경제·외교력에서 남한에 추월당한 초조함 때문에 전세를 만회하고자 벌인 테러의 결과 북한이 오히려 전보다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됐다고 흔히 이야기된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냉전이 다시 고조되는 상황에서 어차피 북한에는 모호한 제3세계의 지지보다 소련·중국의 확고한 지지가 더 아쉬웠다. 아웅산 사건으로 한·미·일 안보체제가 강화된 것은 다른 한편으로 북·중·소의 안보협력이 강화되는 계기도 됐다. 또한 당시 북한은 1980년을 전후해 김정일 후계체제 확립에 부심하고 있었지만, 1978~84년의 제2차 7개년 경제계획이 사실상 실패함에 따라 내부적으로 상당한 체제 불안 요인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웅산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북한의 내부 결속이 다져진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이 테러가 ‘성공’했다면, 다시 말해서 전두환 대통령까지 아웅산 묘소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남한의 보복 조처에 뒤이은 한반도에서의 전면전 발발이다. 아웅산 사건 이후 대통령이 전방 부대 지휘관들을 무마하는 게 힘겨웠다고 했음을 볼 때, 대통령마저 사망했다면 ‘보복-응전-전면전’의 가능성이 꽤 높았으리라 추정된다.

» 아웅산 테러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단호한 응징을 천명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온건한 대응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한 부대를 시찰하고 있는 전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
제2의 12·12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미국의 대북 자세는 큰 차이가 없었으리라 보인다. 미국의 직접 피해가 없는 상황에서 동북아에서 국지전에 말려들고 나아가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상황을 미국이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살해된 것과 각료들만 희생된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독재체제의 구심점이 갑자기 사라지고,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일부 부대는 무력 행동에 나서고,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을 김상협 국무총리의 민간인 내각은 이를 저지하려 하고, 김영삼 등 재야 인사들은 이를 문민정권 회복의 기회로 삼으려 움직이는 상황. 이런 대혼란 속에서 제2의 6·25는 아니더라도 제2의 12·12가 일어나 새로운 정권의 수립을 기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10·26으로 갑작스레 군사정권의 상징이 사라진 상태에서 문민화 움직임을 꺼린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것과 유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났을 수 있다.

이때 미국은 5·16이나 12·12 때처럼 방관자로 남았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을 수 있다. 남한 내부의 정변이 아니라 북한의 ‘공격’에 의한 남한의 혼란인 이상, 한반도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이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사실상의 군정을 실시하려 들었을지 모른다.

결국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남한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한반도에서 미국과 북한의 움직임이 숨가쁘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을 더해볼 수 있다. 과연 그것뿐일까? ‘만약의 만약’은 불가능할까?

알려진 대로라면 전두환 대통령은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암살을 모면했다. 본래 버마 순방 일정은 일주일을 앞두고 미중앙정보국(CIA)의 통보를 받고 갑자기 수정됐다. 원래는 버마에 도착한 10월8일 밤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게 돼 있었는데, 그대로 진행했다면 각료들과 동시에 대통령이 현장에 도착함으로써 암살을 피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튿날인 9일 당일에도 본래는 대통령이 조금 더 일찍 현장에 도착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안내를 맡은 우치 라잉 버마 외무장관이 17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각료들이 먼저 묘소로 향했던 것이다. 라잉 장관은 “집에서 TV를 보다가 늦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당시 버마에서는 전력 부족 때문에 아침 방송을 내보내지 않고 있었다.

범인들은 일찌감치 현장에 폭탄을 설치한 뒤 상황을 보고 원격조종으로 폭탄을 터트렸는데, 어째서 대통령이 도착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트렸는지가 의문이다. 이는 당시 먼저 도착한 각료들이 단상에 도열해 있는 상황에서 이계철 버마 대사가 차를 타고 도착했고, 그를 전 대통령으로 오인한 범인들이 격발장치를 작동했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과연 이처럼 중대한 테러를 저지르면서, 목표물인 전 대통령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을까? 또 영빈관에서 전 대통령이 탄 차가 출발하는 상황을 지켜보지 않은 이유는 뭘까?

물론 지나친 의심은 금물이다. 비록 아직까지 북한이 자신들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범인은 북한 공작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대통령이 일부러 자신의 각료들을 폭사시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1983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그러나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북한이 목표를 ‘남한 대통령 제거’에서 ‘남한 대통령 제거를 노린 듯한 대규모 테러’로 바꾸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시도해 ‘성공’했다면, 북한으로서도 그 결과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한에 더욱더 강경한 정권이 들어서거나 미국이 군정까지 실시하는 상황이라면 북한의 안보가 크게 흔들린다. 애초 김정일 후계체제의 확립이 북한의 목표였다면, 그렇게까지 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실패’한 아웅산 테러만으로 충분히 목표가 달성된다. 당시 분석은 ‘북한이 전 대통령을 제거하고 전격 남침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한과 미국의 데프콘3에 대응해 경계태세에 들어가기는 했어도, 남침을 준비하는 듯한 무력 동원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상상력은 그만 접더라도, ‘북한의 일방적 무력 도발’ 가능성과 그 앞에서 먼저 미국의 눈치부터 살펴야 하는 우리 처지는 1983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정치적·군사적 사건의 대응에는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이익에 따라서 대응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본 구도부터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위원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2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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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16:44

민주주의 우물파기, 버마 총선과 국민의 선택

[아시아생각] 선거법 부터 이미 '썩은 물'

기사입력 2010-03-25 오전 8:13:47
버마(미얀마) 속담에 "방금 판 우물에서는 깨끗한 물을 기대할 수 없다"는 표현이 있다. 첫 술에 배가 부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은 정해진 순서와 원리원칙이 따른다는 교훈이다.

버마 군부는 작년 국군의 날(3.27)을 맞아 이 속담을 언급하며 군부가 지향하는 "규율민주주의"도 정해진 중간단계가 성숙될 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국민에게 훈시했다. 우물의 '수질'이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정화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군정 최고지도자는 금년 독립기념일(1.4)을 기해 금년 내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고 천명했고, 마침내 지난 8일부터 5일에 걸쳐 선거와 관련된 5개의 법령을 국영언론을 통해 공표했다.

연방선거위원회법(Union Election Commission Law), 정당등록법(Political Parties Registration Law), 상원선거법(Amyotha Hluttaw Election Law), 하원선거법(Pyithu Hluttaw Election Law), 지방의회선거법(Region Hluttaw or State Hluttaw Election Law) 등이 그것인데, 이로서 구두로만 서약한 총선 실시는 구체화의 수순을 밟는 첫 단계에 진입했다.

4월부터 군부는 군 수장의 처조카인 뮌스웨(Myint Swe) 제 5특별작전국장을 수장으로 하는 과도정부(caretaker)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선거체제에 돌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기 시작했다.

▲ 아웅산 수찌 여사의 삶을 다룬 책 <Perfect Hostage>
출마지역까지 확정 받은 중앙부처 고위 관료는 해당직위 만료일을 6월로 통보받았고, 아웅산 수찌(Aung San Suu Kyi)의 가택연금 해제 예상일이 11월이라는 정부 인사의 언급을 배경으로 했을 때 총선은 9월 말에서 10월경에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숫자 11을 맹신하는 군정 지도자가 어떻게 점성술사의 점괘를 받드느냐에 따라 선거일은 결정될 것이다.

국내외 정당, 민주화운동집단과 이해관계를 가진 국제사회는 곧 선거법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쏟아냈다. 그 중 가장 이목을 끄는 대목은 아웅산 수찌의 총선 입후보 여부, 선거위원회 구성의 적절성 등 주로 참여와 경쟁에 바탕을 둔 민주성의 원칙으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복역 중인 자는 상하원 선거법 각 제 4장 7조 2항, 제 5장 10조 1항에 따라 총선에 입후보를 할 수 없고, 선거권도 없으며, 정당등록법 제 2장 10조 5항에 따라 정당원으로도 등록될 수 없다.

1989년 공표된 선거법과 달리 금번 선거법에서는 외국인에게만 국한되었던 입후보 및 선거권 제한기준이 직계 자손까지 확대되어 군부의 외국인혐오증(xenophobia)은 더욱 확대되었다. 독소조항은 외국인과 결혼한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찌를 겨냥한 것이 틀림없지만 약 2200명에 달하는 정치범도 총선 입후보에서 배제될 전망이어서 반군부세력의 공백이 한 층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총선을 통해 1990년 총선 결과는 유효하지 않을 전망이기 때문에 국민민주주의연합(NLD)이 국제사회에서 누렸던 정통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전 대법원 부원장이자 군법무관을 지낸 우 떼잉쏘(U Thein Soe)를 위원장으로 하는 17인의 선거위원회는 퇴역 장교, 재판관, 교수, 대사 등 친정부 인사로만 구성되어 선거관리의 중립은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NLD는 선거에 참가하기 위해 정당등록을 할 것인지를 논의 중에 있는데, 3월 27일 공식 입장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NLD도 내부적으로 아웅산 수찌 파벌과 띤우(Tin U)를 중심으로 하는 퇴역군인 파벌로 양분되어 있는데, 전자는 총선 참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오는 5월 7일이 총선을 위한 정당등록 만료일인데, NLD가 정당등록을 하더라도 군부의 정치탄압은 그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NLD의 내부결정은 존중되어야 마땅하지만 과거처럼 강경노선만을 고집할 경우 정치권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의회민주주의시기(1948-1958, 1960-1962) 총리와 부총리를 역임했던 우 누(U Nu)와 우 쪼응에잉(U Kyaw Nyein)의 여식(女息)들이 창당한 민주당(Democratic Party)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국 내 망명정치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당은 군부가 조직한 정당의 정권창출을 기정사실로 수용하지만 원내에 진입한 후 협상을 통해 연정을 수립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군부도 USDA를 단일정당으로 창당하지 않고, 공무원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 집단, 기업인, 변호사, 의사 등 신흥엘리트 집단, 소장파 군 인사로 구성된 군부 집단 등으로 세분화하여 총선 이후 합당이나 연정의 단계를 거칠 것으로 보인다. 단일정당으로 총선에 참가하여 대패한 1990년 총선의 교훈이자 다당제에 입각하여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는 평가를 위한 전략적 획책이기도 하다.

정치개혁이라는 우물을 파서 민주주의라는 정수(淨水)를 국민에게 공급하려한다면 양질의 식수를 제공할 입지를 선정하고 토양을 훼손시키지 않는 도구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용수가 넉넉하지 않은 땅이면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할 것이며, 식수가 나오지 않으면 그 이유를 역으로 조사하여 식수가 솟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군부가 우물을 파기 위해 선정한 터와 도구는 이미 오염되었고, 거기서 샘솟는 우물은 군부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할 것이다. 몇 번에 걸친 정화를 하더라도 우물의 질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울 샘물을 강압적으로라도 마셔야하는가? 아니면 우물이 정화될 도구나 기술, 새로운 터를 선정할 수 있도록 제안하여야 할 것인가? 썩은 물을 파는 현실에 수수방관하는 것이 더 서글프지 않은가.

* [아시아 생각]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내는 칼럼입니다.

 


/장준영 부산외대 미얀마어강사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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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0 10:40

유엔 인권조사관, 버마의 제도적 유린행위 비난

미국의 소리 2010.03.19 (금)

유엔의 특별 인권 조사관은  버마 정부가 조직적이고 엄청난 유린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제네바에 있는 유엔 인권 이사회에 방금 보고서를 제출한 토마스 오지아 퀸타나 조사관은 버마정부의 일부 유린행위는 인륜을 범하는 범법행위에 해당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소식입니다.

토마스 오지아 퀸타나 유엔 특별 인권 조사관은    지난 2008년 부임한 이래  최근 세번째  버마 방문을 끝냈습니다. 지난달 중순, 4일간 버마를 방문한 퀸타나 조사관은 일정이 지나치게 짧았고, 행보에 제약이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마내 교도소 세곳을 방문해  15명 수감자들과 폭넓은 면담을 가질 수 있었고 그밖에 당국자들과   정당 그리고 소수 인종 집단 대표들도 만났다고 퀸타나 조사관은 밝혔습니다.   

버마정부는 민주체제 수립을 위해 필요한 개혁조치들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퀸타나 특별 조사관은 우려했습니다. 

새로 제정된 선거법은 올해 하반기에 실시될 것으로 보이는 총 선거에 대한 양심수들의 입후보   권리를 박탈했다고 퀸타나 조사관은 지적합니다.

양심수들이 석방되고 표현과 집회 그리고 결사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현 상황에서는  버마가 절대로  신뢰할 만한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게 자신의 평가라고 말했습니다.   

퀸타나 조사관은  버마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민주화 운동 지도자, 아웅 산 수치 여사를 비롯해 약 2100명의 양심수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수치여사는 지난 거의 20년의 대부분을 연금상태로 보냈습니다.

퀸타나 조사관은 수치여사와의 특별 면담 요청을 거부당한 것이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습니다.

수치여사는 양심수이며,  제일 야당의 사무총장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치여사가 양심수라는 것은, 국가 법에 따라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정당 가입도 거부당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퀸타나 조사관은 지적합니다. 소속 민족 민주동맹당은 이번 선거에 참여를 금지당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퀸타나 조사관은 아웅 산 수치 여사의 즉각 적인 석방을 되풀이 요구했습니다.

유엔 특별 인권 조사관인 퀸타나 씨는 또한 버마 북부, 라킨 주에 거주하는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버마 정부의 탄압을 규탄했습니다. 약 100만 명 으로 추산되는 그 지역 이슬람 교도들은 불법 이민들로 여겨지고 소수인종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차별을 당하고 있어 기본권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퀸타나 조사관은 지적했습니다.

버마정부는 그간의 온갖 유인행위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추궁 당해야  한다고 퀸타나 조사관은 말하고 국제조사 위원회가 버마정부의 인권 침해 사례들을 진정성 있게 조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버마정부의 행동은 인륜을 거역한 범죄행위일 수도 있다고 퀸타나 씨는  말합니다.

유엔 주재 버마  대사는 그 같은 퀸타나 조사관의 비난을 가리켜 전혀 사실무근한 내용이라며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유엔 특별 인권 조사관의 보고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고 믿을 수 없는 출처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보에 근거했다고 유엔 주재 버마 대사는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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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0 10:34

만화로 만나는 ‘버마 이야기’

군부독재 고통받는 삶 부담없이 그려내
한겨레

» 〈굿모닝 버마〉




의료 시민단체의 활동가 아내를 따라 독재 국가 미얀마로 간 프랑스 만화가가 그린 미얀마 현실에 대한 만화’라고?

평소 일상생활에서 접할 일 없는 국제 시사 뉴스에 나오는 단어들로 설명하는 만화라니! 여기까지만 보면 의미는 있겠지만 재미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각을 강요하는 만화라고 지레짐작하기 쉽다.

그러나 새로 나온 <굿모닝 버마>(서해문집 펴냄·1만1900원)는 자칫 이런 추측이 책을 집어들지 못하게 할까봐 안타까울 정도로 재미를 주는 만화다. 만화가 왜 만화인지, 똑같은 소재를 만화가 다루면 어떻게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바뀌는지 잘 보여준다.

지은이 기 들릴은 만화가 겸 애니메이션 작가다. 아내가 세계적인 의료 구호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일하는 활동가이며, 이 책에 앞서 북한을 방문하고 그린 <평양> 같은 책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미얀마에 갔으니 정의감이 투철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캐릭터겠거니 예상하게 되지만, 기 들릴이 직접 그린 그의 일상은 바로 이런 예상을 배반한다. 아내가 의료 구호를 하러 떠나면 혼자 집에 남아 아이를 보고 장 보면서 만화를 그리는 ‘난닝구 차림 옆집 아저씨’ 같은 만화가다. 그가 미얀마 생활에서 꼽아낸 만화 꼭지들은 어슬렁거리듯 미얀마를 돌아다니면서 겪고 깨닫게 된 이야기들을 그렸다. 미얀마 만화가 지망생들을 상대로 만화 강좌를 열었다가 자칫 반정부 행위로 오해받을 일을 저질러 수강생이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는 경험을 하고, 아웅산 수치 여사의 집을 구경하러 갔다가 군인들에게 쫓겨나기도 한다.

<굿모닝 버마> 최고의 매력은 ‘썰렁한 유머로 만나는 부담 없는 재미’다. 수십년 동안 국민들을 억압하는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목소리 높여 비판하기보다는 ‘미얀마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몰랐던 미얀마의 문화와 풍속을 만나는 재미도 가득하다.

참고 사항. 책 제목에 등장한 나라 이름이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인 이유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국민들을 학살한 이미지를 지우려고 일방적으로 나라 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꿨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과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아직도 버마라는 옛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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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6:33

미얀마 군정, 수치 여사 출마 차단



(AP=연합뉴스) 미얀마 군사정부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사진 오른쪽)가 올해 총선에 출마하는 것을 법적으로 원천 차단했다고 10일 국영신문들이 보도했다. 사진은 2002년 5월6일 옛 수도 양곤에서 수치 여사가 지지자들과 함께 걷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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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6:30

美 "버마 선거법, 민주주의 조롱" 비난

(워싱턴=연합뉴스) 황재훈 특파원 = 미국은 10일 아웅산 수치 여사의 총선 출마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 미얀마(버마) 군사정부의 선거법에 대해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정례브리핑에서 "(버마의) 정당 등록법은 민주주의 절차를 조롱하는 것"이라면서 "다가올 총선의 신뢰를 전혀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크롤리 차관보는 "이는 우리가 버마 정부에 제안해 왔던 것이 아니다"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앞서 미얀마 군부는 이날 발표한 정당등록법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은 경력이 있는 사람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고 규정,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수치 여사의 선거 참여를 원천 봉쇄했다.

크롤리 차관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대(對)미얀마 유화 정책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는데 대해 "우리의 버마에 대한 개입 정책은 계속될 것"이라면서 "지금까지의 결과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좀 더 나은 것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조지 부시 행정부 때와 달리 미얀마와 고위급 대화를 갖기 시작했으며, 지난해 말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 회원국 정상들과의 회담 때는 오바마 대통령이 테인 세인 미얀마 총리를 직접 만나 수치 여사 등 정치범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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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6:25

세계여성의 날, 버마여성난민을 위한 바자회



【서울=뉴시스】최한규 기자 = 8일 서울 중구 명동 한국YWCA연합회 앞마당에서 열린 서울YWCA주최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여성인권 캠페인의 일환으로 태국국경지역 버마 여성난민의 지원을 위해 모금바자회를 개최했다.

회원들과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ch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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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6:22

美 "北, 버마에 核·무기 수출 가능성 우려"

"버마 군사평의회와 北 군사협력 중단 요구" 

정세리 인턴기자(미국 스탠포드대학 졸업) | 2010-03-04 13:59

미 국무부 필립 크롤리 공보담당차관보는 3일(현지시간) 정례브리핑에서 미 정부가 북한의 대(對)버마(미얀마) 핵무기 기술 수출 가능성에 대해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크롤리는 이날 “몇 차례 언급해 왔듯이 우리는 북한과 버마 간의 (군사적) 접촉 가능성이 우려된다”며 “(북한-버마 간의) 핵협력에 대한 우려 또한 (북한의 무기 수출입을 금지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874호를 국제사회와 함께 추진해온 이유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또한 “지난해 가을에 (버마와) 논의에서 버마는 결의 1874호에 대해 지지를 표했지만, 앞으로도 (이 문제에 관해) 양자대화에서 계속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워싱턴포스트(WP)는 4일 오바마 행정부가 “버마 군사평의회가 북한의 군사 기술을 구입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WP는 미 관료의 발언을 통해 “지금까지 미국은 버마 고위관료와 네 차례 회의를 가졌다”며 “가장 결정적인 교류는 북한에 관한 논의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미 관료는 “우리는 버마에 명백히 통보했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요구가) 받아드려졌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WP는 이어 “버마 핵문제에 대한 우려는 오바마 행정부의 2007년 시리아에서 있었던 유사사건 재발을 피하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이 시리아에서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한 원자로 건설을 도와줬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한편 WP는 “시리아 원자로 건설 완료를 불과 몇 주 혹은 몇 달 앞둔 채 이스라엘 군용기는 같은 해 9월 원자로를 폭발시켰다”고 전했다.

신문은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 민간 과학국제안보연구소(Institute for Science and International Security) 소장의 발언을 통해 “(시리아 사건은) 엄청난 정보 실패였다”며 “북한이 (핵 협력을) 다른 곳에서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면서 “미 정부가 다시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올브라이트는 ‘버마: 핵보유 지망자’라는 공동보고서에서 시리아에서 핵시설 건설을 도와준 북한 무역회사 남촌강(NCG)이 현재 버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NCG는 유엔 안보이사회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으며 NCG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지만 버마에 존재하는 자체가 “(핵무기) 매매에 대한 의심을 반드시 심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과 버마 간의 군사관계는 2007년에 맺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핵무기 외에 휴대 무기, 미사일 부품 등을 판매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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